2007년 12월 31일

이날 오전에는 Himalaya를 출발하여 Machhapuchhre Base Camp (MBC)까지 걸었다. 그리고, 오후에는 MBC에서 ABC까지 다녀왔다. 트랙

1. himalaya(7:42) - Deurali(9:19)

어제 밤도 오늘 새벽에도 별들은 찬란히 빛나고 있었지만 사진을 찍는데 성공하지 못하였다. 전체 일정을 무리없이 잘 챙겨 준 여행사의 실수를 억지로 하나 꼬집으라면 트레킹 설명회에서 밤하늘에 대하여 사전 고지를 하지 않은 점이다. 미리 알았더라면 예습을 좀 하고 오는 건데 말이다.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석총을 볼 수 있었다. 네팔산 석총은 반출금지 품목이다. 아직도 어둑어둑한 계곡 위로 봉우리들이 찬란히 빛나고, 그 사이로 그믐달이 지고 있었다. 동굴을 하나 지나자 지금까지 숨어 있던 Machhapuchhre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계곡은 아직 어둡다.

2. Deurali(9:32) - MBC(12:30)

Deurali에서 간단한 음료를 하고 얼마를 지나자 날카로운 V자 계곡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드디어 안나프르나 밥그릇을 통과하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계곡 중턱까지 해가 비추기 시작하면서 Machhapuchhre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좀 후에 드디어 우리가 지나는 계곡까지 해가 비추기 시작하였다. 좁은 계곡을 지나서 나타난 좀 넓직한 개활지에는 아직도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고도를 보려고 GPS를 보니 위성이 세 개밖에 잡히지 않는다. 위성 세 개가 일직선으로 또렸하게 잡히는데 나머지 위성은 전혀 잡히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좁은 계곡 사이로 길다란 하늘이 보였다.

GPS 원리는 간단하다. 지구를 돌고 있는 GPS 위성들이 자신의 위치와 시각을 알려 준다. GPS 단말기는 이 신호를 받아서 자신의 시계와 비교하면 그 위성까지 거리를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위도, 경도, 고도 등 세 가지니까 위성 세 개로부터 신호를 받으면 미지수가 세 개인 간단한 이차방정식을 풀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GPS 시계를 계속 보정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위성 네 개로부터 신호를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무가 무성하여 신호가 너무 약한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세 개는 뚜렷하게 잡히는데 나머지 위성이 전혀 잡히지 않는 경우는 없었다.

주변은 황량하였지만 이런 곳까지 흰그늘용담 비슷한 녀석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번 산행 오르막에서 마지막으로 본 꽃이었다. 아직도 키 큰 나무들이 보이는 수목한계선을 지나면서 드디어 안나푸르나 속살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Annapurna 방향에는 개스가 약간 껴서 신비로운을 더해 주었고, Machhapuchhre도 항상 그렇하듯이 의연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고산 지대 특유의 경치를 즐기면서 Machhapuchhre Base Camp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고 맛있는 식사를 하였다. 이제는 드디어 이번 트레킹의 최종 목적지인 Annapurna Base Camp 를 왕복할 참이다. 용량이 훨씬 큰 raw format 사진을 넉넉하게 찍을 욕심으로 카메라 메모리를 노트북에 옮기는데 문제가 생겨서 노트북을 껐다가 다시 켜는 등 부산을 떨어야 했다. 겨우 메모리를 정리하고 ABC 왕복 준비를 하고 난 후, 의자에 앉았는데 갑자기 온 몸이 나른해지면서 졸음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계곡을 올라오면서 주변 경관에 취하여 고소증에 대한 걱정을 잊고 있었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고소증인가. 갑자기 겁이 나면서 과연 ABC까지 오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시작하였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3. MBC(13:37) - ABC(16:00) - MBC(17:31)

그래도 가는 데까지는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선두 바로 뒤에 바짝 따라붙었다. 나같이 비실비실한 사람을 위하여 포터 몇몇이 맨 몸으로 동행한다는 것이 그나마 안심이었다. 처음부터 내 모습이 위태해 보였는지 포터 한 명이 배낭을 맡아 주겠다고 하였으나 일단 거절하였다. 올라갈수록 안나푸르나 밥그릇 바깥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밥그릇 안 쪽의 속모습이 다가오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Annapurna South, Fang, 그리고 최고봉인 Annapurna I등이 아닐까 싶은데 물어보기도 귀찮을 지경이 되었다.

선두 바로 뒤에 따라 붙었던 나는 어느새 한참 뒤쳐지기 시작하였다. 중간에 아늑한 공간에서 잠시 쉬는데 잠이 쏟아졌다. 쉬기 전인지 후인지 난 포터를 불러서 배낭을 맡겨 버리고 우모복을 입었다. 손이 시리기 시작하였다. 난 웬만큼 추운 날씨가 아니면 두꺼운 장갑은 잘 끼지 않는다.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카메라를 쓸 수 없으니까 말이다. 얇은 털장갑을 주로 쓰는데 이정도 날씨에 손이 시리다니 참으로 한심하였다. 같이 가는 동료 이야기를 들으니 이것도 고소 증세란다. 그런데 옆에 가는 포터를 보니 맨 손이었다. 배낭에 든 두꺼운 장갑을 꺼내서 포터에게 주었다.

이 곳은 널찍한 초원지대를 지나서 완만한 경사를 올라가는데 분위기는 마치 한라산 윗세오름 오를 때 펼쳐지는 초원지대를 연상케 한다. 멀리 ABC 롯지가 보이기 시작하였으나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동료들의 독려가 아니었으면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 뻔 하였다. 사진을 한 두장 찍으려고 하였으나 이 역시 고소에는 독이라 하여 아무렇게나 셔터를 몇 번 눌러 보았을 뿐이다.

ABC 까지 과연 내가 갔었는지조차 좀 의심스럽다. 별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ABC에는 한 2-3 분이나 머물렀을까. 여기에서 찍은 단체 사진에 검은 우모복을 입은 내가 서 있으니 갔었다고 믿을 뿐이다. 누군가가 방향을 바꾸어서 Machhapuchhre 를 배경으로 다시 찍자고 한 것 같은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최고봉인 Annapurna I을 겨우 하나 찍었다. Annapurna I은 여기까지 와야먄 그 전모를 볼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사진을 찍기도 힘들었다. 렌즈를 바꾸어서 좀 더 디테일을 찍었어야 했는데 말이다. 내려 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중간에 잠시라도 쉬려고 앉으면 일행 중 한 명이 계속 걸으라고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걸었다. 카메라도 포터가 짊어진 배낭에 넣어 버렸는데 언제 카메라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MBC에 도착하자 마치 집에 온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좀 차리고 석양에 물든 Machhapuchhre를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MBC 롯지에 도착하여 내 방에 들어간 나는 등산화 끈을 겨우 풀러서 신을 벗고 옷은 입은 채로 침낭에 기어 들어갔다. 동료들이 가져다 준 비아그라와 꿀물을 마시고 바로 잠이 들었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멀리서 이런 대화들이 아련히 들여왔다.
       - 와, 진수성찬이네...
       - 그럼 내년에 다시 봐요...
2007년은 이렇게 저물어 갔다.

이날 찍은 또 다른 사진들